하루를 지나며
내가 겪어 보지 못한 고통 앞에서는 공감도 위로도 쉽게 말할 수 없다. 예전에는 머리로만 알았다.
두 해 동안 삶의 바닥에서 허덕였고, 최근 한 달 가까이 죽을 듯 앓고서야 그 뜻을 몸으로 배웠다.
통증과 무력감이 이어졌다.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회심 전에도 진지하게 떠올린 적 없던 죽음이 그때는 너무 좋은 선택지처럼 보였다. 나는 이미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 있었다.
그 시간을 지나면서야 곁에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아픔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고, 서로의 약함을 숨기지 않은 채 위로할 수 있는 형제자매들. 내가 무너져도 나를 낯설어하지 않는 이들. 혼자 버티는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여러 사람에게 붙들려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히어로를 좋아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 눈에 띄는 사건, 화려하고 긴박한 삶을 동경했다.
그러나 회심 뒤의 삶은 정반대였다. 그 어느 때보다 고달팠고, 가난했고, 황량했다. 악당을 쓰러뜨리는 장면도, 모든 것을 뒤집는 반전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광야에서 하루씩 건너야 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힘이라 여기는지부터 바꾸셨다. 나는 더 강해지지 못했다. 대신 연약한 채로도 삶을 이어 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스쳐 지나갔을 형제자매들.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가 지나온 아픈 시간. 멀리서 판단하던 타인의 고통은 더는 내 삶 바깥의 일이 아니었다.
광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방식까지 바꾸었다. 가장 뜻밖에 달라진 것은 ‘이상형’이었다.
회심 전에는 이상형이 따로 없었다. 그때그때 운명에 맡겼다.
덕분인지,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한 연인과의 이별 끝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회심 직후에는 상대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두 해가 지난 지금, 내 마음은 다시 달라졌다.
이제 내게 마음이 가는 사람은 고난의 길을 걷는 자매다. 주님의 손에 붙들린 채 자기 몫의 광야를 건너는 사람.
몸이나 마음의 아픔을 안고 사는 자매들을 보며 처음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예전 같으면 연민에 그쳤을 것이다. 아니, 그 삶의 무게가 두려워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픔보다 그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이 먼저 보인다. 약함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주님의 손을 놓칠 때에도 주님께는 놓이지 않은 채 하루를 건너는 모습. 그와 함께 걷는 주님까지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편안함과 평안이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편안함은 평안을 보장하지 않았고, 불편함도 행복을 모두 빼앗지는 못했다.
나는 가진 것을 지키려 움켜쥐다가 도리어 골병이 들었다. 손이 비고 나서야 이미 곁에 있던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왜 그리스도인은 저마다의 광야를 지나야 할까.
아직 모른다. 모든 고난을 하나의 뜻으로 묶을 수도 없다. 이 광야를 끝까지 건널 수 있을지, 그 끝이 언제 올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주님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은 알 것 같다.
주님은 나를 히어로로 만들지 않으셨다. 대신 타인의 아픔 앞에 머물 줄 아는 조금 더 인간다운 사람으로 빚고 계신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내가 겪은 일이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다. 병은 병이고,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 빈 곳은 여전히 허전하다.
나는 이 광야가 끝나기를 바란다. 몸뿐 아니라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리던 날들을 떠올리고 싶지도, 다시 겪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도 주님의 붙드심을 그 어느 때보다 생생히 겪는 지금이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충만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광야 한가운데서 행복을 누리는 이 아이러니 앞에서 나는 오늘도 놀란다.
광야에서 보는 것은 주님이고 얻는 것은 사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