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의 여신 최정화1화굳세어라, 최정화
핑크.
속이 비치는 듯하면서도,
손끝을 베일 만큼 선명한 연분홍빛의 결정.
감으면 번지고,
뜨면 사라지는 색.
그 화려한 잔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지금 내 걸음이 자꾸 빨라지는 것도, 꿈의 잔상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일까.
늦봄의 센치함쯤으로 넘기기에는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있다.
아니.
그깟 꿈 때문은 아니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걸.
진짜 문제는—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해 버렸다는 것.
근처 화장실에서 몇 번이고 화장을 고치면서도, 같은 생각만 되씹는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갈까…?’
사람들이 보일 반응을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신청할 때만 해도 반쯤 장난이었고, 어제까지도 대수롭지 않았다.
오고 싶긴 했지만, 이 정도로 떨릴 줄은 몰랐어.
잠도 잘 자고 왔다.
온라인으로 만난 게 처음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심장이 뛸 이유는 없다.
의미도 없이 피드를 새로고침하다가, 도로 화면을 끈다.
‘무서울 게 뭐 있어…? 한바탕 웃고 가면 되지.’
모임 시간까지 아직 40분.
가게의 문고리를 잡는다.
밀어보고, 당겨보고, 괜히 한 번 더 밀어본다.
어느 쪽으로도 열리지 않는다.
오픈 전.
크게 한숨이 새어 나온다.
“흡.”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엇,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모임 오신 거 맞으시죠…?”
“네, 네! 맞아요—”
키가 제법 큰 남자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다.
글만 읽던 사람인데, 프로필 사진 한 장 없던 게 아까울 만큼 잘생겼다.
그가 문을 여는 동안, 나는 속으로 나무란다.
바보 같은 얼굴.
문고리를 잡을 때만 해도 제법 도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게 해주는, 오래 단련한 표정.
그것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문이 열리지 않아 안도하며 숨을 크게 내쉬었을 때 한 번.
그가 올라와 인사를 나누었을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속으로 내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한 번.
세 번의 수치심이 둥글게 뭉쳐 목 아래에 걸린다.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야.
첫 문턱은 넘었으니까.
안으로 들어서자, 낮에는 아직 잠든 바 특유의 냄새가 난다.
나무, 유리잔, 덜 깬 조명, 그리고 어제 닦아낸 술의 희미한 흔적.
“음료는 자몽 에이드 괜찮으신가요?”
자몽.
순간, 꿈에서 보았던 연분홍빛이 쓸데없이 떠올라 잠시 머뭇거린다.
“아, 네.”
옆머리를 넘기며 대답.
내 인생의 복선이 자몽 에이드일 리는 없잖아.
그러다 습관처럼 묻고 만다.
“저기, 혹시 커피도 있나요…?”
“준비하는 김에 한 잔 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남자는 뒤로 돌아 커피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제야 음료가 자몽 에이드로 통일된 건 아닐까 싶어, 급히 일어나 말을 보탠다.
“아, 저 자몽 에이드도 상관없어요. 다들 그걸로 통일하신 거면…”
“괜찮아요. 아마 오늘 오시는 멤버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으며 머리를 또 넘긴다.
머리카락을 너무 많이 넘기고 있다.
급기야 몇 가닥이 손가락 사이에 걸린다.
하지만 이제 와서 손을 얌전히 내려놓으면, 그것대로 더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워 보이려면 부자연스러운 짓을 계속하는 수밖에.
굳세어라, 최정화.
모임 시작을 15분쯤 앞두자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한다.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어색하게 계단을 올라와 문을 살포시 열고, 안을 한 번 살핀 뒤 카페 주인인 남자와 인사를 나눈다.
그러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유일한 여자인 나를 보고, 잠깐씩 표정이 멈춘다.
어느 정도 예상해 둔 반응이었기에, 고개를 까딱 숙이며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예상했다고 해서 덜 민망한 것은 아니니까.
“한 분은 조금 늦는다고 연락이 왔어요. 첫 모임이니만큼 먼저 각자 자기소개를 하죠.”
그가 자연스럽게 말을 꺼낸다.
“먼저 저는 아시다시피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낮에는 카페처럼 쓰지만 저녁이 되면 바가 됩니다.
이 시간대에는 손님이 거의 없어서 이런 모임을 하기에는 딱이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자기소개를 마치자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열성 팬.
우리는 온라인에서부터 그를 수장님이라 부르고 있었고, 그 호칭은 여기서도 그대로다.
다만—
아직 나는 그를 그 호칭으로 부르기가 어쩐지 낯간지럽다.
오늘 안에 한 번은 입에 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저기요’만 반복하게 될 것 같다.
아까 커피 시킬 때 벌써 한 번 썼다.
그런 계산을 하고 있을 그때,
시선이 너저분한 탈색머리의 청년에게 모인다.
얼굴이 지나칠 만큼 굳어 있다.
“안녕하세요, 미노리 아오이입니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파고들 때, 내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온다.
“아, 미노리 님!”
박수까지 친다.
수장의 블로그에서 몇 번이고 댓글을 통해 대화를 나눴던 분.
노란 머리의 어여쁜 미소녀 프로필 사진을 단 미노리 아오이 님은 꽤나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수장의 솔직한 글에 때로는 다른 각도의 해석을 보태는 분이라, 그때마다 거의 팬레터 같은 대댓글을 달곤 했다.
실제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노란 머리 엘프녀의 캐릭터 이미지가 닉네임과 맞물려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평균을 웃도는 키에, 셀프로 탈색했는지 노란 머리가 얼룩덜룩한 청년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의 이미지가 빠르게 다시 조립된다.
맞물리는 것은 머리 색 하나뿐이지만.
“반갑습니다.”
어색한 듯 미노리 님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다들 박수를 치자, 나도 유난히 힘을 보탠다.
다음은 정갈한 바가지머리의 청년.
“스페크고요. 직접 뵙는 건 처음이지만 수장님 글은 초창기부터 읽었어요.
참고로 금딸 3일 차예요—!”
스페크의 말에 모두가 뒤집어진다.
그제야 긴장이 확 풀린다.
그렇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명목상의 목적은 하나.
바로 ‘금욕’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그 뒤로 최연소인 중학생 장정이 짧게 고개를 숙인다.
의자에 앉아도 발끝이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보인다.
말년 휴가 중이라는 군인 요아비소는 자기소개라기보다 보고에 가까운 말투로 이름을 밝힌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남자의 닉네임은 장구는 못말려.
닉네임부터 이미 한 세대쯤 철 지난 농담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최정화.
이름을 말하는 순간, 테이블 위에 내 것이 아닌 시선 몇 개가 더 얹힌다.
그렇게 수장까지 일곱 명—남자 여섯과 나 하나—가 둥근 테이블을 채운다.
앞으로 이어질 두 시간의 ‘금딸 토크’를 기대하고 있다.
정작 내 이야기를 꺼내면, 저 여섯 얼굴은 어떻게 변할까.
심장이 또 빨라진다. 이번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먼저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장이 입을 연다.
“블로그를 운영하며 오프라인 모임도 몇 번 열었지만, 금딸을 주제로 모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막상 모집하고 보니 이렇게 와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문의는 생각보다 정말 많았고요.
잘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행사가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 오늘 오신 분들이 원년 멤버가 되겠네요.
그때까지 열심히 잘해봅시다.”
“금딸 캠프도 가나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페크의 질문에 수장이 담담히 답한다.
실소가 터져 나온다.
여기 있는 사람들만 알아듣는 개그.
수장이 쓰는 금딸 에세이에서 나온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금딸을 해야만 하는 금딸 캠프.
채찍을 든 감시관이 온갖 유혹으로 참가자들의 금욕을 방해하는, 말도 안 되는 금욕 버라이어티.
장난인 줄 알았는데, 수장은 그 아이디어를 꽤 진지하게 붙들고 있었고, 우리 사이에서는 오래 밈처럼 돌았다.
문제는 유혹을 구체적으로 상상할수록 금딸 자체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여성 참가자에게는 어떤 시련이 공평할지를 토론하다가, 누군가 상상이 과했는지 리셋—그러니까 금딸 카운트가 Day 0으로 돌아갔다는 댓글을 남긴 적도 있고.
그때는 남 일처럼 웃었는데, 막상 이 자리에 앉고 보니 그 농담이 슬그머니 내 의자 밑까지 따라온 것 같다.
참 한심하고,
참 이상하고,
참 열정적인 세계—
그런데 그 한심함이, 그 무엇보다 진심에 가깝다.
우리는 모두 웃고 있지만, 농담의 밑바닥에는 각자의 실패가 깔려 있다.
참지 못한 밤들.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서 벌어진 작은 패배들.
우스운 단어 뒤에, 다들 잠깐 수치심을 숨기고 있을 뿐.
웃지 않으면 너무 비참해지는 일들이 있으니까.
“그럼 이제 뭘 하면 되는 걸까요? 금욕에 관해 이야기한다든지.”
웃음이 잦아들 무렵, 미노리 아오이 님이 묻는다.
수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일부러 이번 모임의 형식을 따로 정해놓지는 않았어요.
주제가 주제인 만큼 우리가 어디까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이 모임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먼저 알아봐야 했거든요.
그러니 오늘은 첫 모임이자 일종의 실험입니다. 프로토타입인 거죠.”
“그럼 우리가 실험 대상인 겁디까~?”
족히 쉰은 넘어 보이는 중년의 배불뚝이 남성—
그 말과 함께 그의 배가 테이블 쪽으로 슬며시 밀려온다.
초등학교 때 아저씨 코미디언들이 쓰던 말투.
그 당시에도 이미 슬쩍 촌스럽다고 여겨졌던 바이브.
차라리 스페크가 했다면 의도적인 레트로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아저씨가, 정말 아저씨 같은 타이밍에, 정말 아저씨 같은 추임새를 넣고 있으니 잠깐 내가 90년대에 앉아 있는 줄.
“사실 레퍼런스는 있습니다.”
수장이 잔 아래 맺힌 물기를 엄지로 한 번 훔치고 말을 잇는다.
“오래전부터 이런 모임을 해보고 싶었어요.
최근 글에도 썼듯이 AA, 그러니까 익명으로 모이는 알코올 중독자들의 자리요.
그런 걸 보면 사람은 결국 어디엔가 속하고 싶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속을 터놓고 만날 수 있는 자리는 많지 않죠.
그렇다고 병원이나 상담 프로그램까지 찾아가기는 부담스럽고요.
제가 필요했던 건 그냥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작은 자리였어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만들어봤어요.”
수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인다.
“그리고 한 가지는 먼저 약속할게요.
오늘 나눈 이야기는 밖으로 가져가지 않는 걸로 해요.
말하기 어려운 건 그냥 넘기셔도 됩니다.”
한 끗만 어긋나도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진다.
그래서 모두 온라인에서 나누던 유쾌함을 지키려 애쓰면서도, 어디까지 가벼워져도 되는지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너무 진지해도, 농담만 해서도 안 되는—
아무도 그 선을 모른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을, 우리는 이름도 없는 공동체의 첫 테이블 위에서 더듬고 있다.
“이미 여러 번 읽고 오셔서 아시겠지만, 오늘은 제 이야기부터 해볼게요.
최대한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라 조금 자극적인 표현들이 나올지도 몰라요.”
“오히려 좋습니다, 수장님.”
“오케이, 스페크 님 이야기도 기대할게요.”
잔잔한 웃음이 걷히자, 수장이 입을 연다.
“자위를 시작한 건 여섯 살 때로 기억합니다.”
순간, 어깨가 움찔한다.
전개가 너무 빠르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아니.
여섯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