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그러면 안 돼
얼마 전 교회 초등부 성경학교에서 사흘 동안 보조 교사로 섬겼다. 처음 맡은 일이었다.
그 사흘 동안 많은 것을 보았지만,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아주 짧은 장면이었다.
아홉이나 열 살쯤 된, 안경 쓴 천방지축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찌그러진 페트병을 나팔처럼 불었다가 두 손으로 꽉 구기기를 되풀이했다.
나는 그 모습이 그저 귀여웠다.
곁에 있던, 조금 더 조숙해 보이는 친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면 안 돼.”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어린 시절부터, 어쩌면 지금까지도 나는 저 말을 하는 쪽의 아이였으니까.
얼마 전의 나였다면 그 조숙한 아이에게 더 마음이 갔을 것이다.
맞아, 그러면 안 되지.
즐기는 쪽보다 삼가는 쪽이, 철없는 아이보다 일찍 철든 아이가 더 옳아 보였다.
나는 늘 기뻐하기 전에 의심했고, 누리기 전에 경계했다. 좋아해도 되는지, 웃어도 되는지, 혹시 내가 놓친 잘못은 없는지부터 살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빨리 깨닫고, 더 성숙한 사람인 듯 굴었다. 내게 주어진 것을 걷어 내면 나도 그저 허술하고 연약한 인간인데, 마치 나만은 아닌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믿기 전에는 더 심했다. 자기계발이든 지식이든 일이든 쉬지 않고 나를 몰아붙였다. 나처럼 달리지 않는 사람은 게으르거나 잘못 산다고 여겼다.
나를 채찍질한 바로 그 채찍으로 다른 사람까지 재고 있었다.
회심 뒤에도 그 버릇은 남았다. 모양만 신앙으로 바뀌었을 뿐.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야 했다. 조금도 오해해서는 안 되었고, 다시는 죄를 지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믿음마저 완벽하게 해내려 했다.
생각과 감정을 검열하고, 조금만 어긋나도 나를 정죄했다. 주님을 바로 믿고 싶은 마음이 불안과 괴로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존 스토트 목사와 폴 투르니에 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때로는 착각이어도, 순진하고 맥락이 부족한 믿음이어도, 하나님이 오히려 그걸 더 기뻐하시는 것 같다.”
그 말을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경학교에서 두 아이를 보았다.
페트병을 나팔 삼는 아이와 곁에서 “그러면 안 돼”라고 말하는 아이.
그 사이에서 내가 잃고 살아온 것이 보였다.
다 알지 못해도 아버지를 믿는 마음. 주신 것을 기뻐하고, 그 기쁨을 곁에 나누는 마음. 어린아이 같은 순전한 믿음.
나는 정답을 모으느라 그 단순한 마음을 오래 잃고 있었다.
최근에야 조금씩 자기검열과 정죄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 법을 배운다.
믿음은 내게 늘 무거웠다. 내 뜻을 꺾고, 가장 아끼는 것을 내놓고, 끝내 순교라도 해야 닿을 수 있는 경지 같았으니까.
그러나 주님이 내게 주시는 것은 언제나 하루치 일상이었다.
주어진 형편을 받아들이고 그 안의 은혜를 알아보는 것.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말씀 안에 머무는 것. 나답게 웃고, 누리고, 나누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가장 오래 놓친 기쁨이었다.
그날 아이에게는 찌그러진 페트병도 나팔이었다.
나도 이제 주님이 주신 하루를 그렇게 두 손에 받아 들고 싶다.
아이처럼 그저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
그것이 복된 하루이고, 이제야 배우는 순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