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게임을 했다
그 말이 끝난 뒤, 테이블에는 아주 짧은 렉이 걸린다.
웃음도,
격려도,
“아이고, 그랬습디까” 같은 장구는 못말려식 추임새도 나오지 않는다.
그 문 안쪽에도 아무도 보지 않는 방이 있었던 걸까.
방금 전까지 우리는 한 사람의 주니어가 항복했다는 말에 웃고, 짱구 꼬추라는 비유까지 받아낸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번 문장 앞에서는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게임을 했다.
게임에 빠졌다.
게임 때문에 시간을 날렸다.
그 정도라면 대충 알아들을 수 있다.
중독이라는 이름표도 붙일 수 있고, 어른들이 좋아하는 말로는 현실 도피라고 정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있었다.
미노리 님은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 하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마침내 다음 문장을 꺼낸다.
“음란물이 노력 없이 주어지는 보상이라면, 게임은 노력과 보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줍니다.
랭킹은 오르고, 전적은 남고, 누군가는 나를 인정해줘요. 그래서 단순히 시간을 낭비했다고 말하기도 어렵죠.
물론 게임 자체가 나쁘다거나, 게임을 법으로 찍어누르는 식의 통제에 찬성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성장이 현실의 저에게 넘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야 할 에너지를 게임 안에 쏟아붓는 거죠.
그러다 다리가 저릴 때까지 앉아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와요. 하루가 통째로 사라져 있죠.
그 공허함을 잊으려고 다시 게임을 켭니다. 그래서 제게 게임은 취미라기보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삶이었습니다.”
댓글에서도 그랬지만, 미노리 님의 말은 언제나 문단째로 정리되어 있다.
말이라기보다, 이미 어딘가에 써둔 글을 조심스럽게 낭독하는 사람처럼.
낭독이 끝나면 박수를 치는 게 맞다.
그런데 아무도 치지 않는다.
내가 자그맣게 친다.
자그맣게 쳤는데도 소리가 혼자 남는다.
뒤늦게 두어 명이 따라 치고, 미노리 님은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때 헛기침 하나가 끼어든다.
몇 번이나 추임새를 넣으려다 번번이 놓친 스페크는, 이번만큼은 만회하겠다는 듯 새삼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저는 지금 이렇게 떠드는 것과 다르게, 원래는 되게 소심했어요. 학창 시절부터 최근까지 쭉요.
그런데 수장님 글을 읽고 저 자신을 바꾸는 데 매달리게 됐죠.
아직 열아홉 살이지만, 불과 반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완전 딴판이에요.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말도 못 붙였는데, 지금은 벌써 두 명에게나 차였습니다.”
“박수.”
수장의 추임새에 따라 모두가 박수를 친다. 댓글을 통해 이미 알려진 이야기.
테이블 위로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스페크는 싱글벙글 웃으며 빠르게 말을 잇는다.
“논문도 몇 개 찾아봤어요. 번역기 돌려가면서요.
솔직히 절반은 못 알아들었어요.
도파민이니 세로토닌이니 나오는데, 일단 제 뇌가 망했다는 말 같긴 하더라고요.
대충 제가 이해한 건 이거예요.
너무 쉬운 보상에 익숙해지면, 현실의 창피를 견디는 힘이 약해진다.
사람을 만나려면 기다려야 하고, 거절당해야 하고, 내가 방금 병신 같았나 복기해야 하니까요.”
도파민과 세로토닌.
일단 이 테이블은 세로토닌보다 도파민에 가깝다.
그것도 지나치게 농축된—
“근데 현실은 너무 귀찮잖아요.
여자애한테 말 걸려면 일단 심장이 터지고, 말 걸고 나서는 단톡방에 뭐라도 돌았을까 봐 눈치를 봐야 하고, 까이면 진짜 며칠 가요.
그런데 스마트폰은 안 그래요. 켜면 바로 나오잖아요.
거절도 안 하고, 비웃지도 않고, 제가 이상한 말을 했다고 다음 날 학교 복도에서 피해 다니지도 않아요.
화면 속 여자들은 전부 내 편처럼 굴어요.
현실 여자애들보다 훨씬 예쁘고, 훨씬 쉽고요.”
쉽다.
그 말은 조금 싫다.
그런데도 정확해서, 입을 다문다.
“그걸 매일 손바닥 안에 넣고 다니는데, 버틸 수 있는 애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니 자꾸 그쪽으로 빠지는 거예요.
뭐, 여기서 직접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사실 일반 음란물보다는… 이건 나중에 차차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요.
어쨌든 이제는 달라요.
가상에서 왕처럼 누리는 쾌락보다, 현실에서 거지처럼 쪽팔리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어요.
지금의 쪽팔림은 나중에 거름이라도 되겠지만, 가상의 쾌락은 저를 좀먹기만 하거든요.
아직 뇌가 자라는 시기니까, 이미 망가졌다고 주저앉기보다는 이 거지 같은 현실에서 아등바등하면 조금은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거죠.
그러니 저한테 금딸은 인생 최고의 자기계발이에요.”
“금딸 며칠 차시죠?”
“3일 차입니다.”
오늘 들어 가장 큰 폭소가 터진다.
수장은 아연실색하고, 스페크는 부끄럼도 없이 바가지머리를 찰랑이며 경례한다. 그 모습이 묘하게 정겹다.
실제로는 나이 차가 제법 나는 형과 동생 사이겠지만, 스페크에게만큼은 수장이 선생님이나 다름없는 모양이다.
아, 선생님이라기엔 그의 고백도 참 뭐하지만.
“어, 저는…”
웃음이 잦아들자 다음 차례인 장정이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힌다.
침묵이 더 길어지기 직전, 수장이 먼저 손을 든다.
“괜찮습니다, 다음—!”
장정은 안도한 듯 웃었지만, 웃음이 입가에 제대로 걸리지는 못한다.
차례는 자연스레 요아비소에게 넘어간다. 심하게 붉어진 장정을 의식하듯 요아비소가 빠르게 입을 연다.
“아, 저는 말년 휴가를 나온 요아비소이고, 어떻게 보면 스페크 님과 비슷한 고민을 줄곧 해왔습니다.
제 경우에는 꼭 음란물만이 문제였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 일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수장님 글을 자주 읽게 되었어요.
특히나 부대에 있을 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죠.
이제 얼마 안 있다가 전역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좀 후회가 되기도 해요.
자기계발을 한다고 수장님 블로그 글을 읽고, 혼자 글도 써보고, 나름 이것저것 해보면서도… 정작 매일 얼굴을 보는 부대원들과는 잘 지내지 못했거든요.”
“그런 느낌은 전혀 안 들어요. 오히려 인상이 되게 좋으신데.”
말을 마친 요아비소에게 나도 모르게 끼어든다.
의기소침한 말을 덤덤하게 하는 그에게서는 그 고민의 무게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거짓말을 한다거나 어둠을 가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흐트러짐 없는 옷매무새, 단정한 얼굴, 담백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 때문인지, 인간관계에 큰 콤플렉스가 있으리라고는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물론 사람의 고민이 겉모습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에엣—감사합니다, 정화 님. 되게 기분이 좋네요.
물론 군 생활을 하면서 많이 바뀐 것도 있어요.
제가 말할 때 손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의식적으로 바디랭귀지를 연습하기 시작했어요.
찾아보니까 그런 콘텐츠가 정말 많더라고요.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계속 의식하다 보니 조금씩 몸에 붙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요즘 이성과 대화하는 법, 나아가 사귀는 법까지 공부하고 있어요.
여기 여성분도 계셔서 더 조심스럽긴 한데,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꼭 경험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이성 관계거든요.
그래서 이번 휴가에는 홍대에도 나가봤어요.
사실 어제 처음으로 다른 커뮤니티에서 만난 분과 식사를 했는데, 만나기 전에는 닉네임만 보고 이성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남성분이셨더군요.”
그 말에 스페크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문다.
“그런 면에서는 큰 수확이 없었지만, 제 마음속 두려움은 많이 가신 것 같습니다.”
“다음 모임 때는 꼭 여자친구분과 오셨으면 좋겠네요.”
“물론입니다, 수장님. 올해 안으로 반드시 데려오겠습니다.”
결의를 불태운 요아비소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든다.
자그마한 인형.
연푸른 머리칼을 한, 어딘가에서 몇 번쯤 본 적 있는 캐릭터.
“몇 분이 오실지 몰라서 열 개 정도 준비했는데, 하나씩 드릴게요. 이건 제가 좋아하는 버추얼 가수의 굿즈예요.
흔히 버튜버로 묶이지만, 일반적인 버튜버와는 조금 다릅니다.
예전 활동의 흔적도 캐릭터 안에 남아 있는데, 팬들 사이에서는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암묵적인 금기라… 여기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형을 하나씩 테이블 위로 밀어놓는다.
내 앞에도 손바닥만 한 연푸른 머리가 멈춘다.
일곱이 앉은 자리에 열 개를 가져온 청년.
“필요 없으시면 다른 분께 주셔도 됩니다. 제 약점이 인간관계라고 말씀드렸는데, 요즘은 버튜버에 흠뻑 빠져 있거든요.
가상 캐릭터가 방송을 하는 건데, 그냥 캐릭터가 아니라 제 채팅을 읽어주고 가끔은 대답까지 해줍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철처럼 삐걱이며 웃는다.
주인은 점점 붉어지고 있는데,
인형만은 끝까지 같은 표정.
“원래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일방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존재였잖아요.
그런데 그 캐릭터가 제 이름을 불러주고, 제 말을 받아주는 순간이 생기는 겁니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고, 말을 잘못해 크게 망신당할 일도 없고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저한테는 구세주 같은 분입니다.”
요아비소가 웃는다.
농담으로 넘기려는 웃음인데, 문장에는 과장이 없다.
무엇보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방금 건넨 칭찬을 취소하고 싶어진다.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 안도하는 청년.
이성과 대화하는 법을 공부한다면서도, 자신을 거절하지 않는 목소리에 오래 기대고 있는 남자.
“거짓된 자기애를 숨기려다 보니, 겉치레가 과해지는 법입죠.”
순간 “엇!” 하고 소리를 내며 커피를 쏟을 뻔한다.
나도 방금까지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다만 이름까지 붙이지는 않았다.
한 조각으로 사람 전체를 덮는 일만은.
그 한마디 뒤로, 테이블이 둥글지 않아졌다.
‘어떡하지…?’
주변을 살펴도 별다른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분위기 메이커 스페크를 바라보지만, 그 역시—
처음으로 웃을 타이밍을 놓친 얼굴을 하고 있다.